작성자 Admin(admin) 시간 2023-11-11 2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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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동하는 실내: 증식-점유-위장-침투하는 비인간 주체들

안진국 (미술비평)Lev AAN (Art Critic)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진은영의 시집을 집어 읽다가 눈을 뗄 수 없는 구절을 발견했다. 물컵에 담긴 슬픔, 투명 유리 조각처럼 담긴 슬픔. 코로나19 펜데믹은 우리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경제 질서를 의미하는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경제·경영 용어는,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경제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보다 비물리적인 디지털 세계로 삶의 많은 부분이 옮겨갔다. 사람들은 자기 집 밖에 나오길 꺼리고, 타인과 대면을 경계하고, 온라인으로 원격 관계 맺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혼자 머물 수 있는 실내가 가장 편하고 안전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잠재의식까지 침투했다. 우리는 외부와 단절된 내부로 점점 깊이 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심리적으로 위축된 공간이다. ‘코로나 블루’가 마음으로 쉽게 스며드는 공간이다. 고립된 공간, 홀로 된 외로움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공간. ‘슬픔이 담긴 물컵’과도 같은 공간이다. 그렇지만 이 공간은 단순히 갇히거나 닫힌 공간은 아니다. ‘슬픔이 투명 유리 조각처럼’ 담긴 아름다운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슬픔은 다만 인간의 몫, 인간이 느끼는 감정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곳은 아름다움으로서의 가능성(투명 유리 조각)이 잠재된 공간이다. 진은영의 시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현재와 같은 ‘뉴노멀’ 시대에 현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비애와 동시에 인간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가능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구절은 진은영의 「청혼」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로, 청혼에 대한 감정이 녹아 있어, 여기서 해석하는 것과 그 전제가 다르다.

 

 

평평한 존재론: 사유의 ‘뉴노멀’

⟪자라나는 실내 - 탈주의 전략⟫은 안과 밖,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사물 등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사유의 전환을 보여주는 전시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아직도 진행형인 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이 미덕이 된 시대에, 고립된 곳을 상징하는 ‘실내’에서 느끼는 단절감이 단지 인간적인 시각이며,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일 뿐이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이번 전시는 인간중심주의 너머에 존재하는 사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길이 바로 ‘탈주의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다. 이 ‘탈주의 전략’은 현재 사유의 ‘뉴노멀’로 확립되고 있다. ‘(비판적) 포스트 휴머니즘’이라 불리기도 하고, ‘물질적 전회’나, ‘신유물론’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휴머니즘 너머를 향하는 사유다. 바로 ‘평평한 존재론(flat ontology)’을 탐색하는 사유. 이 사유가 이 시대의 뉴노멀로 자리잡고 있다. 

이 사유를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이라는 구절에 빗대어 본다. 이번 전시는 ‘슬픔’과 ‘투명 유리 조각’이 서로 교차하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슬픔’과 ‘투명 유리 조각’의 실체는 ‘물’이다. 둘 다 물컵에 담긴 물에 대한 은유로, 물이라는 실체에 대한 감정이다. 또한, ‘슬픔’이 ‘투명 유리 조각처럼’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물컵을 실내, 즉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 대한 유비(類比)로 설정한다. 그리고 ‘슬픔’을 코로나19로 외부와 단절되어 외로움과 싸우는 ‘인간의 감정’이라는 자리에, ‘투명 유리 조각’을 단절된 공간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이라는 자리에 놓는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부정성을 내재한 ‘슬픔’과 긍정성의 면모가 있는 ‘투명 유리 조각’은 ‘슬픔 vs. 투명 유리 조각’으로 대립된 관계다. 하지만 물을 매개로 ‘슬픔 ≒ 투명 유리 조각’(“슬픔이 … 투명 유리 조각처럼”)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이 둘의 관계는 물이 슬픔의 감정도, 아름다움의 형질도 모두 가능할 뿐 아니라, 이 슬픔이 아름다움의 형질로도 변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흥미로운 점은 ‘슬픔’도, ‘투명 유리 조각’도 모두 우리(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펜데믹 시대의 ‘실내’는 코로나19를 피해 격리되듯 우리가 선택한 공간이다. 그래서 이 공간을 ‘슬픔’처럼 부정적인 감정이 흐르는 공간으로 인식하기 쉽다. 실내는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고 죽어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외부는 움직이는 공간이고, 내부는 멈춰 선 공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 다시 말해서 휴머니즘(humanism, 인본주의)에 기초한다. 인간중심주의가 인간이 종적 위계를 만들어 가장 윗자리에 앉아, 마치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이라면, 휴머니즘은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를 여기는 사고방식으로 강도 차이가 조금 있으나 이 둘은 일맥상통한 사유체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체계는 인간 외의 다른 관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자라나는 실내 - 탈주의 전략⟫ 전시기획자인 변경주 큐레이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내는 각자의 전략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다양한 비인간 생명체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펜데믹 시대의 실내는 휴머니즘 시각에서 정적이고 ‘슬픔’으로 채워진 공간일 뿐이다. 하지만 비인간 주체들에게 시선을 돌리면, 역동적인 ‘투명 유리 조각’처럼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한 공간이다. 실내에는 반려동물, 반려식물 등 보는 즉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가 있는가 하면, 파리와 모기와 같은 해충, 어딘가 숨어 있을 거미, 습한 곳에서 자라나고 있을 곰팡이, 반려식물의 흙에 서식하는 지렁이나 벌레 등 작은 생명체가 존재한다. 그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공기 중에 날아다니며,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먼지는 살아있는 듯 공기 중으로 떠오른다. 물은 싱크대와 화장실에서 순간순간 흘러내리고, 전기는 실내를 감싸고 있는 전선을 타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간이 앉을 때마다 소파는 움푹 패고, TV와 컴퓨터, 스마트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를 찾기 위해 쉬지 않고 신호를 감지한다. 실내는 결코 멈춰진 공간이 아니다. 활기 넘치는 생명체들과 사물들로 가득 채워진 아름다운 공간이다. 제인 베넷(Jane Bennett)이 말한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의 공간인 것이다. 변경주 큐레이터는 이런 비인간 존재들이 생동하는 실내를 ‘자라나는 실내’라 명명한다. 이들은 생동하기 위해 점유와 위장, 침투, 복제, 그리고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전략을 보여주는데, 이것을 변경주는 ‘탈주의 전략들’이라고 말한다. 이 전략들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휴머니즘을 넘어서야 한다. 인간을 주체로, 인간 외의 생물과 사물을 객체로 위계화하는 시선을 거둬들이고, 평평한 존재론적 시각에서 이 세계를 구성하는 비인간 존재들을 바라봐야 한다.

이번 전시는 생동하는 비인간 존재들이 지닌 탈주의 전략을 작업으로 보여주는 하루.K, 강주리, 변진, 남다현 작가가 참여했다. 전시는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Part 1. 증식하고 점유하다’에서는 변진과 강주리 작가가 실내공간에서 증식하고 점유하는 비인간 존재들을 드러낸다. Part 1에서 선보인 두 작가의 작업은 ‘틀’에 대한 사유가 스며 있다. 변진은 ‘실내(장소)’라는 틀, 그 자체를 사유하는 면모를 보이고, 강주리는 ‘장식’이라는 틀을 중심으로 고정된 사유방식(틀)의 변화를 끌어낸다.

두 번째 부분인 ‘Part 2. 위장하고 침투하다’에서는 하루.K와 남다현 작가가 실내공간에서 자주 마주치는 생동하는 물질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한다. 이 두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물질이 위장하여 침투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모습이다. Part2에는 인간 ‘인식’의 새로운 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하루.K는 ‘음식이 함의한 세계’를, 남다현은 ‘물질의 외형과 그 존재론적 특성’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인식 변화를 촉구한다.

 

변진: 응시-관찰-기억을 통한 현실의 재건

변진은 일상의 공간을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작가는 작업실(실내) 안에서 그곳을 관찰하여 생동하는 식물과 사물, 감정의 흐름을 페인팅과 콜라주, 혹은 설치로 재구성하는데, 이것을 그는 ‘재건(reconstruction)’이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 작업의 제목에 ‘작업실’과 ‘재건’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이 때문이다(<볕이 든 작업실(노랑)>[2020], <볕이 든 작업실(연두)>연작[2020], <재건1(작업실의 왼편 코너)>[2022], <재건2(작업실의 오른편)>[2022], <재건3(작업실의 바닥과 화분)>[2022]).

작가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습성이 있다. 그는 어떤 공간에 자신이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이 그 공간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감각을 자주 느낀다. 이러한 감각을 작가는 “분리됨”, “혼자 두는 상태”, 또는 “고독”이라고 말한다. 이 감각이 형성되게 된 것은 유년 시절부터 낯설고 어색한 장소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에 이를 때까지 부모를 따라 세계 이곳저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이동은 ‘자신이 존재하는 곳’(장소, 국가, 공동체, 문화권)에서 ‘자신의 존재’가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느낌을 갖게 했다. 즉 장소와 자신이 분리된 경험을 한 것이다. 작가 자신이 존재하는 장소이지만, 그 장소에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상황은 자신이 서 있는 장소와 자신 사이에 어긋남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작가의 작업에서 근본적 배경으로 작동한다. 변진이 자신의 작업을 “‘나’와 ‘그곳’이 부딪히며 내는 마찰음이고, 불협화음”이라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작업노트). 

‘재건’은 변진의 내면과 관계된 해체와 재구성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과 분리된 장소를 응시, 관찰, 기억하면서 그 공간에서 발견한 빛과 그림자, 색채, 리듬, 질감, 공간감 등을 해체 및 재구성한다. 이렇게 ‘재건’된 장소는 작가의 내면 공간이다. 그가 응시, 관찰, 기억하는 장소의 표정이 그의 내면 상태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나의 시선은 내가 가진 태도와 나의 심리적, 정신적, 감정적 등 내면의 상태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작업노트) 그래서 변진이 자신의 작업 주제를 “장소에 머무는 동시에 분리된 심리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작업노트). 결국, 그가 그려내는, 단절과 연속이 교차하고, 결속과 어긋남이 동시에 존재하는 장소의 풍경은 작가 내면의 풍경이다. 그렇다고 장소를 외면하고 내면에만 침잠하지는 않는다. 실존하는 장소를 오랫동안 관찰해서 그렸다는 점에서 자신이 안착하지 못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적인 상황을 인정하고 직시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내면의 풍경으로 재구축한 ‘현실의 재건’이라 할 수 있다.

변진에게 ‘작업실’은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공간이다. 내적이고 은밀한 정신과 정서를 반영하는 내면의 장소이며, “장소가 아닌 내가 나임을 일깨워주는 ‘순간(moments)’”이기도 하다(작업노트). “나 자신이 ‘진짜 나’에 가까워지는 심리적 공간”이다(작업노트). 그래서 내면을 재건하는 실존의 공간으로 변진은 작업실을 거듭 불러온다. 

‘슬픔’이 ‘투명 유리 조각처럼’ 아름다워질 수 있듯이, 장소와 분리된 작가의 내면은 그의 작업에서 작업실에 실존하는 생동하는 물질의 ‘재건’으로 아름답게 드러난다. 이것이 변진이 보여주는, 갇힌 장소를 탈주하는 열린 전략이다.

 

강주리: 적응, 변이, 혼성화, 그리고 파레르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간중심주의는 자연 생태를 교란한다. 인간의 자연 파괴와 무분별한 개발은 환경 오염을 낳았고, 기형적 존재들이 곳곳에서 출몰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기형적 존재들의 출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쉽게 환경 오염에 의한 ‘괴물’의 탄생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환경에 적응하여 변이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이는 어찌 보면 생명체의 ‘탈주의 전략’처럼 보인다. 따라서 기형적 존재들은 오직 인간의 편의만 생각하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끌어내는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자연의 생명체가 지닌 강인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강주리는 꾸준히 자연 생태의 이상 징후에 관심을 두고 이러한 존재들을 그린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뒤틀어진 자연에 적응한 변종,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재배’되면서 변이되고 혼종화된 개량종, 인간이 만들어낸 장치와 결합된 개체 등을 실재와 환영이 중첩된 방식으로 작업에 담아낸다. 작가는 이러한 개체들을 날카로운 펜선을 지그재그로 겹쳐 긋는 크로스 해칭(cross-hatching) 기법으로 그리는데, 펜선 드로잉이 가진 정밀한 묘사는 사실성을 불어넣고, 바늘 같은 선들은 시각적 감각을 찌르며 시각성을 자극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작가가 최근 장식적 요소를 작업의 주요 요소로 끌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주리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화려한 외관을 지닌 가구였던 ‘비바리움’의 형상을 빌려와, 생명체를 관찰하는 장치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개체가 되도록 표현한다(<비바리움 #1>[2021], <비바리움 #2>[2021], [2021]). 영상 기구의 원시적 형태인 조트롭(zoetrope)을 세련되게 재구성한 키네틱 작품인 (2022) 또한 장식성이 돋보이는 작업이다. of life #2> stand, in glass>

그렇다면 강주리에게 장식은 어떤 의미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식’을 부차적이거나 불필요한 것이 아닌, ‘주체’로써 바라보고자 했다.”(작업노트) 이는 그가 주변부에 있는 존재들, 즉 변이되고 혼종화된 존재들을 중심부로 가져왔던 그동안의 작업 방식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얼핏 쓸모없어 보이는 개체, 부가물이나 부수적으로 보이는 존재를 주요하게 바라보는 방식은 강주리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사유방식으로, 이러한 사유방식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회화의 진리(La vérité en peinture)>(1987)에서 말했던 ‘파레르곤(parergon)’을 떠오르게 한다. ‘파레르곤’은 ‘주변’을 뜻하는 ‘파라’(para)와 ‘작품’을 의미하는 ‘에르곤’(ergon)이 합쳐진 말로, 부수적인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작품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장식품’을 의미한다. 회화 작품이라면 작품을 감싼 액자 같은 것이다. 데리다는 파레르곤이 작품이 아니지만, 작품과 분리할 수 없는, 오히려 작품(에르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주체는 아니지만, 주체와 붙어 있기에 온전히 주체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것, 주체로서 가능성을 지닌 것, 이것을 파레르곤이라 할 수 있다. 강주리는 원종(에르곤)에 대비되는 변종(파레르곤)를 호명함으로써 이들을 주체의 자리에 앉혔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본체(에르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식체인 ‘비바리움’(파레르곤)을 주체의 자리로 가져온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지닌 화려함을 부각하며 더욱더 극적이고 상징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낸다. 변이·혼종화가 생명체의 탈주 전략이라면, 주변부의 중심화는 강주리의 탈주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하루.K: 산수 유람의 흥취로 요리된 미각의 공간

만물이 소생하는 자연은 우리에게 경외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도전의 대상이다. 특히 동양에서 자연은 하나의 이상향이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산수(자연)는 이상, 동경, 미지를 의미하며 정신적인 차원과 연결했다. 옛사람들은 아름다운 산야를 유람하며 풍류를 즐기고 정신을 수양하며 심성을 맑게 했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에는 이러한 산수 유람의 흥겨움과 이상향을 동경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전통 산수화는 현대인에게 고리타분한 옛날 그림처럼 취급되고 있다. 

하루.K는 현대인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에 관한 관찰과 고민 속에서 동양의 산수 정신과 현대인의 유희 대상인 음식을 초현실적으로 결합한다. 이를 통해 산수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는 산수화의 근원적 의미를 되짚어 봄으로써 산수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전통 산수화의 고답적인 방식을 넘어선 현대적인 산수화를 선보인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산수 유람의 흥취가 스며 있을 뿐만 아니라, 유희를 즐기는 현대인의 모습이 녹아 있다.

작가는 전통을 계승한다. 그런데 그가 계승하는 전통은 형식보다는 정신적인 차원이다. 하루.K는 자연을 향한 전통적인 동양 정신이 현대적인 삶과 맞닿을 수 있는 접점을 모색했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이 ‘음식’이다. 음식은 자연의 산물이다. 우리가 아무리 가공하더라도 음식의 식자재는 흙에 뿌리내린 식물이고, 땅을 딛고 선 가축이고, 바다를 누비는 물고기다. 음식에 내재해 있는 것은 경이로운 자연이다. 작가는 산수화를 타고 흐르는 자연을 향한 전통적이고 근원적인 정신을 기초로, 현대인이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그렇지만 자연의 경이로움을 품고 있는 음식을 산수화처럼 그려낸다(<맛있는 산수(연어 스테이크)>[2022], <맛있는 산수(케잌 한 조각의 여유)>[2022]). 하루.K는 이것이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이룬 현대의 이상향이라 말한다. “전통적 이상향이 정신이었다면 현대의 이상향은 정신과 물질에 조화에서 나온다.”(작업노트) 『화엄경』을 211자로 압축한 「화엄경 법성게」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란 말이 있다. ‘하나의 티끌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라는 뜻이다. 음식은 자연이 물질화된 형태다. 그 속에서 자연을 본다는 것은 티끌 속에 우주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접시에 담긴 음식은 평지나 산야를 닮았다. 사발에 담겨 나온 국이나 국수는 바다 위 섬을 닮았고, 그릇에 가득 담긴 밥은 나지막한 동산의 모습이다. 음식을 먹으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아름다운 산수를 유람하며 흥취에 취하는 것과 여러 가지로 닮아있다. 작가의 산수 작품에는 국물에서 수영하거나 음식 위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그곳에서 데이트하는 현대인이 등장한다. 음식이 자연이 되었을 때,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이다. 음식을 즐기는 것이 어쩌면 현대인이 산수를 즐기는 모습 아닐까.

하루.K는 음식으로 산수를 즐기는 현대인의 모습을 더욱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최근 입체 산수로까지 그 표현 방식을 넓히고 있다. 작가는 식탁에 진수성찬이 차려진 것처럼 작업을 구현함으로써 음식 산수에 대한 감각을 증폭시킨다(<맛있는 산수>[2022]). 먹을 수 있을 것처럼 접시나 그릇에 담긴 괴암 절벽과 나무들, 작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음식은 사실적인 미각의 공간이 되어 우리 앞에 놓여진다. 접시나 그릇에 맛있는 케이크나 스테이크처럼 담겨 있는 산수 미니어처는 우리의 침샘을 자극한다. 더 강력해진 맛있는 산수 유람이다. 

음식과 어우러진 산수화는 급격한 기후 위기 시대에 자연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음식에 함의된 세계는 식탁이나 실내라는 한정된 공간을 넘어서 자연 속으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이것이 하루.K가 보여주는 탈주의 전략이다.

 

남다현: 재현/표현으로서 미메시스

남다현은 주변의 사물과 환경을 자신의 방식으로 흡사하게 만듦으로써 유사 현실을 구현하여 가상과 현실의 혼란, 실재와 모방의 혼돈을 불러오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여행자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게스트하우스의 부엌을 전시장에 그대로 재현하고(<#23>[2021]), 211페이지의 책(From the Mixed-up Files of Mrs. Basil E. Frankweiler)과 235페이지의 책(Dos niños y un ángel en Nueva York)을 그 모양과 형태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똑같이 필사한 작업을 전시했다.(<#9>[2014-2019], <#20>[2020-2021]) 이러한 그의 작업은 모방과 복제의 근본적인 층위에 있는 ‘미메시스(mimesis)’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한다.

미메시스는 예술에서 어떤 대상을 모방한다는 의미로 자주 활용한다. 하지만 ‘모방’은 서구에서 ‘이미테이션(imitation)’이라 일컬어지기에, 미메시스가 단순 모방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메시스의 기원과 의미를 문헌학적으로 연구한 대표적 학자인 콜러(Hermann Koller)는 미메시스가 모방(imitation)뿐 아니라, 재현 또는 표현의 의미도 포함한다고 말한다. 변하지 않는 실재, 즉 이데아(idea)가 있다는 믿음이 존재나 사건의 핵심(‘순수한 형상’)을 포착하여 다시(re) 현존하게 하는 일(presentation)이 가능하다는 관념을 만들었다. 미메시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의 ‘순수한 형상’을 포착하여 예술의 장으로 가져오는 것으로, 재현(representation)이다. 이 재현은 핵심을 그려낸 것으로, 모방보다 더 큰 범주의 표현(expression)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남다현이 재현/표현하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책의 필사나 사물의 복제는 큰 이유가 없는 일”이라고 자주 밝혀왔다. 따라서 그저 똑같이 ‘모방’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에 관해 “대상이 가진 실존적 가치와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인지(認知)’라는 개념이 질문이 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한다고 말한 바 있다(작업노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물질의 외형 복제를 통해 인간의 ‘인지’를 실험하겠다는 것이다.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싱크대, 작동하지 않은 세탁기와 전자레인지, 노트북, 열 수 없는 문 등 모든 복제 작업은 외형만 복제되었기에 그것이 지녔던 실용적 의미를 잃는다. 생활물품으로서 기능은 사라진다. 대신 예술 작품으로서 기능이 부여된다. 이 변화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외적 형상의 차원에서나 기능적인 차원에서 인지의 교란을 겪게 된다. 실용적 의미가 빠져나간 공간에 ‘인지’와 ‘예술’이 들어서는 것이다. 

남다현의 작업은 사회적인 함의도 품고 있다. 2021년 인터뷰에서 그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필사와 복제를 통해 나와 같은 세대가 지닌 고뇌를 표현하고자 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기계가 찍어내는 퀄리티(quality)에 미치지 못하고 시간은 몇 곱절 더 소요된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어쩌면 지나치게 열심히 살고 있지만, 그 노력이 보상받을 확률은 나날이 줄고” 있는 현재 젊은 세대의 고민을 드러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인터뷰, 2021). 그가 자신의 작업에 빗대어 말한 세대의 고민을 통해 우리는 ‘작업에 큰 이유가 없다’는 표면적인 발언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의 잠재된 생각과 입장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남다현이 보여주는 미메시스는 물질의 존재론적 특성(실존적 가치와 의미)과 예술의 본질, 사회적인 함의(현재 젊은 세대의 고민)를 재현/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실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심연에 가닿아 있다. 실용성이라는 내부의 작동 방식이 내파(內破)된 물질의 외피를 타고 흐르고 있다. 이것이 남다현이 보여주는 탈주의 미메시스 전략이다.

 

사물의 의회: 탈주의 전략

‘행위자-연결망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으로 유명한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사물의 의회(Parliament of Things)’가 필요함을 강력히 주장했다.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사물까지 모두 모여 민주적으로 논의할 사물들의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시도이며, 평평한 존재론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이 의회는 누가 이끌고, 어떤 언어로 논의할 것인가? 사자 혹은 호랑이? 아니면 토끼, 고래, 도마뱀, 지렁이, 장미, 잡초? 그것도 아니면 돌, 물, 스마트폰, 냉장고, 소파, 식탁 혹은 먼지? 아마도 인간이 이끌어야 할 것이며, 인간의 언어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라투르 또한 사물들을 대변하는 존재로 인간(광의의 전문가와 시민)을 지목한 것이리라.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휴머니즘을 넘어서 인간-비인간의 평평한 존재론을 구성할 때, 인간성을 모두 버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인간의 역할은 중요하다. 다만 인간의 시선을 인간 중심에서 비인간 존재들로 돌려, 그들을 자세히 바라보고,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시선과 인식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펜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닫힌 공간에 자주 머물러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슬픔’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그곳이 슬플 이유가 없다. 외로운 공간도 아니다. 주위에 다른 존재들이 있고, 자신과 이 존재들이 뿜어내는 ‘투명 유리 조각’처럼 아름다운 활력이 가득차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투명 유리 조각처럼’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잠재되어 있다. ‘여기-실내’는 인간이 비인간과 함께 자라나는 방법, 휴머니즘에서 탈주할 수 있는 전략으로 충만한 공간이다.